비교철학 학습 결과 보고서

2022. 9. 1. 16:10공부/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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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철학 학습 결과 보고서 

 

1주차 OT

 

2주차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정의란 무엇인가? 로 글을 시작해 보고싶다. 플립러닝으로 강의를 먼저 보고 왔는데 정의에 관해서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대화에 관한 강의였다. 플라톤은 이러한 아름다움(이데아)가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보편적인 아름다움이 있는것이고, 현실은 불완전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죽는걸 두려워하지 않아 독을 먹고 죽었다. 현실이 이데아의 세계가 아니기에 죽어서 이데아의 세계에 갈수 있다 믿은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플라톤은 감격받고 그의 말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렇담 소크라테스는 왜 보편적 진리를 주장했을까? 항상 상대적인게 많았던 시기이기에 이를 비판하고자 그렇게 됬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프로타고라스와의 예를 통해 괴변만 늘어나는 것을 방지해야한다. 괴변에는 그괴변을 거꾸로 해서 반박해야 한다는 말이 와닿았다.  

 

수업시간에는 미의 기준이 있고 없고에 대해서 토론을 하였다. 첫 수업인만큼 첫 발표를 하면서 재미가 있었고, 첫 토론에서는 기존 흑백의 선택지가 아닌 토론을 하면 여러가지 세포분열하듯이 다양한 의견이 나올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미란 어느정도 사회적 합의가 되어있고, 여러가지 이점들이 있기에 미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여러가지 오디션 프로그램도 있는데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각자의 이점이 있기에 미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미의 기준이란 무엇일까, 한 학생의 의견을 요약하면 “딱 보면 알수 있다”이다. 나에게 있어서 미의 기준은 단지 주관적이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좋아하게 된다면 객관적으로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란 역설적이게도 절대적인 정의는 존재할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만의 정의를 가지고 있으며, 비슷한 정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시기에는 그 정의가 그시대의 정의가 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3주차 데카르트

3주차는 데카르트에 관해서 였다. 신을 벗어난 사람의 진리를 찾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핵심은 ‘내가 진짜인줄로만 알았지만 사실이 아닌것들’에 있었다. 중세시대에는 확실하게 정해진 내용(신과 관련하여) 이외의 말을하게 되면 처벌을 받았다. 대표적인 예시로 마녀사냥이 있다. 이처럼 신, 신의 사도의 말만이 사실인 세상에서 데카르트는 이러한 사상에 저항한 사람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어록으로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있는데 모든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생각하고 있는 나를 부정하는순간 내가 없어져서 생각이 못하게 되기때문에 모순이 발생해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참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수업시간에 연역법이랑 귀납법에 관하여 배웠다. 이게 중요한 이유는 신의 세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세시대에는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었지만 데카르트는 의심으로부터 인간은 정신과 물질에 관해 고민하게 되었다. 인간은 정신과 물질로 나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수학과 과학의 지식의 문제가 발달해 인식론이 대두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동양의 한의학에 비해 서양의 해부학은 더 발달하게 되었다. 정리하면 서양은 개념적이며 이론적이고, 인식론적이기도하며 본질적인것을 찾기위해 쉬운 출발이었지만 어려운 결론을 얻었고 동양의 경우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이며 윤리학적이고 현상론적이기에 탁상공론화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데카르트가 만든 해석기하학에서 더 자세하게 확인할수 있는데 데카르트는 좌표란 이미 존재하는 개념을 우리가 깨달아 가는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지식을 파악하는 것은 이미 있는것을 알아가는 것이라는 합리주의 정신을 대변하고 있다. 이에 반대하는 로크의 경험론도 있는데, 경험론은 우리는 백지고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다는 내용이다.

 

수업시간에는 1조가 발표를 해주었다. 첫번째로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거기에서는 규칙을 4가지로 요약했는데 첫쨰는 의심하라, 둘쨰는 나눠서 생각하라, 3번쨰는 간단한거에서 복잡한것으로, 마지막은 문제는 열거하고 빠트리지 말것을 제시해 주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진리탐구를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된 의심은 인간의 감각으로 부처 토대로 했는데 대표적으로 사람이 꾸는 꿈은 현실과 구분하기 어렵다. 두번째는 온 탕을 시원해서 있고싶은곳인지 더워서 나가고 싶은 것인지를 고민해 보았다. 세번째는 사람이 죽는가에 대한 이다. 마지막으로는 군대는 남자만 가야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기로 하였다. 마지막 주네는 ai가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고찰이었다. 이러한 예시들이 대카르트의 의심이다. 그다음 발표자는 신 존재 증명에 관해서 말해주었다. 생각하는 사실 이외에는 참이라는 근거를 찾을수가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이 있는지 먼저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그를위해 관념을 3가지로 구분했는데 타고난, 외래, 나로인해 만들어진 관념이있는데 여기에는 신이 만든 관념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에 이러한 관념은 외부로 부터 와야하고 그렇기에 신은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러한 신을 무한실체, 나의 육체와 정신은 유한실체로 분류하였다. 그렇기에 신은 전지 전능(완전)하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이 완벽한 신을 생각해 냈다는 것을 신의 존재 근거로 삼았다.

추가로 데카르트는 휴식과 명상을 토대로 좌표를 발견해 내었다. 파리의 위치를 나타내고자 할때 가로줄과 세로줄을 그어 기준이 되는 선을 만들고 이를통해 0과 음수의 역할과 정의가 구체화 되었다. 또한 이렇게 추상적이던 대수식을 점이나 그래프로 내타내다보니 복잡한 풀이가 쉬워지기도 하였다. 3번째로 함수에 큰 도움이 되었는데  x에따른 y값의 변화를 보기 쉽게 됨으로써 큰 도움이 되었다. 도움이 된 예시로는 네비게이션이나 스마트폰의 터치가 대표적이다. 둘 모두 위치를 감지하여 우리생활에 큰 도움을 된다. 이러한 수학들은 진리와 가깝다고 주장하였다. 

마지막은 데카르트의 합리론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는데 경험은 정확하지 않고 이성의 통제를 통해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대표적인 예시로 시각장애인은 경험보단 이성적인 부분들로만 이해한다는 것을 들었다. 이에반해 로크는 경험론을 주장하였는데, 태어날떄는 백지이지만 경험을 토데로 이성과 지식을 얻는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마지막 토론주제는 언어는 이성을 통해서인지 경험을 토대로 인지가 되었다. 

 

이렇게 발표는 모두 마치었고 토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차르트의 연역법, 참 아님 거짓이 있기에 다음의 토론 내용을 선정해였다고 한다.

첫 토론인 ai 발달은 필요할까에 대해서 필요한 이유로는 ai는 여러가지 일자리를 새로 만들고,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입장이 주였고 ai 를 통해 학문의 발달이 가능하고 안전도 보장받을수 있다, 반대의 입장으로는 인간이 ai에 지배당하기를 두려운 마음과 일자리가 사라질수도 있다는 입장이 있다. 또한 ai는 죄책감이 없기에 군사적인 측면에서 악용될수 있는 여지가 있기에 조심해야한다는 의견도 있었다.하지만 반면 죄책감이 없기에 민간인을 학살하지 않을수 있어서 오히려 더 발달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었다. 반대의 입장으로는 ai는 계속발달하기에 한계가 없다고 말했지만 정해진 분야 이외의 내용은 하지 못한다는 내용또한 같이 나왔다. 또한 판사에 관한 내용이 나왔다. 인간은 실수를 할수 있지만 기계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지만 딱 정해진 ai의 판결과는 다르게 실제 판사는 더 훌륭한 판단을 내릴수 있기도 하다는 반박 도 있었다. 추가로 개인적인 생각을 덫붙이자면 법의 목적성은 다음 범죄를 예방하는 것이기에 범죄를 다 사형으로 다스리는것이 아닌 상황을 고려하여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번째는 신은 존재하는가에 관한 토론이 이었다. 자연의 신비는 신을 존재한다는 입장을 시작으로 바로 여러가지 반박이 나왔다. 선악이 있음에 의해 전지전능하지 않고, 전지전능함이란 것에는 자체적으로 역설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들수없는 무거운 돌을 만들수 있는가 인데 만들수 있으면 못들으니까 전지전능하지 못한것이고, 못만들면 못만들기에 전지전능하지 못하다고 할수 있다. 또한 인간은 불완전하고 무언가에 의지하고자 만든 가상의것이 신의라는 의견이 뒷바침 하였다. 세상의 불행을 만들어낸 신은 그렇다면 선하냐고 물을경우 대답하기가 껄끄러워 진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것은 이미 우리가 신의 의지를 이해할수 없기에 알수 없는것이라는 반박이 있었다. 전지전능하기에 무조건 사람을 도운다는 생각자체가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바탕이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이외로 신이 만약에 있다면 사람또한 신이 될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다. 만약 ai가 자아를 갖게 된다면 사람또한 그들에게 있어서 신이될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다음은 우리가 수학을 해야하는가? 라는 내용에 대한 토론이었다. 규칙을 해결하는 논리적 사고를 기르는 것이기에 수학을 해야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실생활에도 다양한 수학이 사용되기에 최소한의 수학은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에 반해서는 만약 다른 더 비중이 있는 공부할 내용이 있다면 구지 수학이 아닌 다른것이 더 중요하기에 수학을 할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기하와 벡터, 미적분은 일상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다는 내용이 이를 뒷받침 하였다. 하지만 수학은 문제해결을 기를수 있는 능력을 기룰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문제에 부딪혔을때 여러가지 방향으로 생각을 하는법을 기를수 있어서, 삶을 살아가면서 문제를 부딪혔을때 해결하는 시도를 배울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수학을 안배우면 살아가는데 지장은 없지만 살아가는데 편의성도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지막 토론은 이성을 통해서 언어를 배우는 것인지, 경험을 통해서 언어를 배우는 것인지에 관한것이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인간생활을 하면서 보고 듣고 나오는 반응들을 통해서 배운것이라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나또한 이에 동의하는데 언어란 여러 사람들의 약속이기 때문에 혼자 이성만으로 합의한 언어는 언어가 아니고 여러 사람들과 의견 교환을 통해 얻은 약속들이 언어가 되는 것이기에 언어는 경험을 토대로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릴때 언어를 습득하는것은 이성을 통한것이라고 한의견이 있기에 결론으로 어릴때 처음은 이성을 통해서 언어를 배우고 이후에는 경험을 통해서 언어를 배우는 것이라는 결론이 났다. 



4주차 칸트

 

칸트는 아름다움을 판단할 때는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말했다. 무관심적 이겨야지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느낄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철학 에서는 이성주의와 경험주의가 대표적인데 이성주의는 수학으로 타고난 이성을 통한 앎을 추구하고 대표적으로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가 있다. 좌표를 중요시 하며 연역법을 사용하고 명확한 지식을 전달한다. 경험주의는 경험을 통한 삶을 추구한다. 대표적으로 스피스트, 로크, 흄, 버클리 등이 있고 tabula rasa(백지)를 중시하고 귀납법을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지식의 불명확성이 발생한다. 즉 그럴듯한 확률적 판단을 추구한다. 이러한 이성주의와 경험주의는 과학에 와서 문제가 발생한다. 대표적으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생각해 냈지만, 우리는 모든 물건이 서로 끌어당긴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이러한 경험주의는 경험으로 무언가를 발견하지만 모든것을 경험할수 없기에 증명할 수 없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성주의에서 이성은 경험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험되지 않는 이성으로 어떻게 경험세계를 설명할수 있는지에 대한 모순이 발생한다. 

그렇기에 칸트는 해결책으로 시공간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시공간이란 인간에 인식기능에 있는, 선척적으로 타고난 인식의 틀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공간은 경험적으로는 무한하지만 선험적을로는 유한하다. 그렇기에 유한한 시공간의 틀을 가지고 무한한 외부세계를 경험하며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유한한 경험을 통해서도 사고를 무한하게 뻗어나갈 수 있게된 것이다. 그렇기에 사과도 우리눈에 들어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과를 개념적인 틀 로서 바라본다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설명하였다. 이해를 위해 음악으로 예를들어보자. 우리 밖에 있는 음들이 우리의 백지상테에 기록되면 우리는 경험을 통해 학습을 하지만 아름다움을 느낄수 없어야 한다. 만약 최고의 음악이 이미 이성속에 존재한다면, 이미 완벽하다면 감상할 필요도 없고 수학적으로 음악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하기에 칸트는 우리는 음악을 듣고 보편적으로 감상할 누구에게나 동일한 능력이 있다고 보았고, 그 능력으로 우리밖의 여러 음들을 감상하고 평가할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인식론으로 보면 선험적 감성형식(시공간)을 통해 경험의 내용을 우리는 받아들이고 이러한 경험의 내용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상상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경험들을 분류하여 개념화 하는것을 선험적 오성을 통해 12범주로 나누어야 한다. 하지만 발생하는 문제가 있는데 물자체에 관해서 설명이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이 진실인지 확신할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우리 사람은 현상계의, 인간이 볼수 있는 것만 알수 있고, 본체계는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본체계는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세계 이기에 이는 칸트철학의 한계가 된다.  현대에 빗대어 이성주의는 소프트웨어고 경험주의는 하드디스크에 빗대어 볼 수 있다고 본다. 즉 두가지가 모두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늘에는 별이 있듯 우리 마음에는 도덕률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선의의 거짓말을 할 수 없게된다. 그렇지만 이는 결과주의에 함정에 빠진 것이기 때문인데, 거짓말을 하는순간을 결과를 알 수 없기에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있는 보편적 도덕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런 도덕 의지는 실천 이성으로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유명한  트롤리 딜레마에서 소수의 사람을 희생해서 다수의 사람을 구하는 공리주의와는 차이점이 있는데, 타인을 구하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를 희생해서는 안된다는게 칸트의 입장이다. 

 

그렇게 수업은 연역법과 귀납법으로 시작되었다. 오늘의 발표 주제는 의성의 딜레마 였는데 처음으로 이성주의와 경험주의를 설명해 주었다. 앞서 미리 들었던 강의내용을 다시한번 깔끔하게 짚어주었다.그렇기에 첫번째 처음 주제는 이성은 감정의 노예인가? 에 관해서였다.나의 의견은 감정은 이성을 통해서 학습된다고 생각하였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여러가지를 배우고 그러한 과정속에서 언제 화를내고 기뻐하는지 학습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대되는 입장으로는 이성보다 감정이 우위에 있다는 입장으로 예를들어 충동구매를 들었다. 하지만 감정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놀기만 하기보다는 사람은 사회생활을 하기에 이성이 더 강하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재밌던 의견으로는 mbti가 있었다. 사람을 이성적인 사람과 감성적인 사람으로 나눈 테스트지만 그 테스트 에서마저도 절대적인것은 없었고 사란은 다 어느정도 부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음으로는 칸트의 해결책 인 시공간을 제시해 주었다.온전히 참인 명제는 존재하는가에 대한 토론이었다. 대부분 명제에 관한 정확한 답이 존재하기에 참인 명제는 존재한다는 입장이 많았다.하지만 이에반해 사람의 인식이 인지를 못해서 다른 무언가가 존재할수도 있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 생겼다. 나는 현 시대에 참인 명제는 존재할수 있지만 영원히 참인 명제는 존재할수 없다고 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참인 명제가 변경이 될수도 있긴 하지만 한국이 이세상에 존재했었다는 명제는 참이므로 시간을 도입하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다음은 칸트의 인식론에 관하여 발표가 있었다. 프리클래스 에서 들었던 컴퓨터의 예시를 다시금 설명해 주었다. 토론주제로는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이 과연 진실일까에 관한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대부분 사람을 예를들어 가면을 쓰며 살아가기에 우리가 보는 것들은 진실이 아닐수도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하는데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꾸면낸 나는 내가 아닌것인가? 나는 그또한 나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거짓된 모습을 보여도 그또한 그 사람일 뿐인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 토론의 대상이 진실이 아니면 진실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게 되는 모순이 발생하여 나는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는 칸트의 도덕철학에 관해서 발표가 있었다. 마지막 주제는 선의의 거짓말은 윤리적인가? 였다. 처음 시작은 선의의 거짓말은 윤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반해 대상을 위하게 된다면 거짓말은 윤리적이게 될수도 있다는 점이다.하지만 거짓말 이라는것 자체가 상대가 인지를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될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선의의 거짓말은 윤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필요한 필요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짓말을 알았을시 안 사람이 기분이 나쁘지 않다면 선의의 거짓말이 윤리적이게 될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성으로만 사는 공허하게 되지도, 경험만으로 맹목적이게 되는것도 아닌 두가지가 골고루 섞여 있어야 한다. 

 

  • 오늘 배운 내용 - 무지논증, 무언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그 근거를 제시해야지 그에 대한 의문을 증명할 이유는 없다



5주차

우리가 발표를 맡게된 헤겔의 혁명의 시대, 꿈틀거리는 정신의 역사에 관한 내용이었다. 헤겔은 다시금 이성을 중요시해서 절대 정신으로 나타내었다. 그렇게 강의는 처음 성형수술의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 하였다. 기존 플라톤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본뜬 예술을 아름다울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나 헤겔은 사람의 손을 거쳤기에 작위적으로 행해진 인간의 노동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주장하였다. 

초창기에 정신에 관해서, 주관적 관념론 - idealism이 있는데 내 관념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이 있다. 비슷한 이야기로는 원효대사의 해골물이 있는데 관념만 있을뿐 사람마다 다른 관념을 갖는것은 자연스럽다는 이론이다.여기서 참된 실체는 오로지 신뿐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에 반대로 인식론적 실재론이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소박실재론이 있다.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은 선험적 능력을 통해 인식 가능한 현상과, 그렇다고 관념만 있는것이 아닌 본체는 분명하지만 명확한 파악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즉 감각과 분석을 통해서 현상을 파악할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헤겔은 더 나아가 절대적 관념론을 제시하였다. 휴머니즘, 신이중심이 아닌 사람중심으로 해석한 것인데 본체를 인간은 파악할수 있다는 점이다. 그 근거로 원시인에게는 선험적 능력이 없고, 원시인의 야망문명보다는 인류가 일궈낸 찬란한 문명이 훨씬 뛰ㄴ어나다는 것을 이유로 내밀었다. 그렇기에 역사를 중요시하지만 다소 인간중심적이기에 위험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형식논리와는 다른 변증법을 사용했는데 형식률은 다음의 3가지 규칙을 따른다. 1. 동일률(a=a) 2. 모순률( a =! ~a) 3. 배중률 (값과 값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 그렇기에 기면 기인거고 아니면 아닌것이다. 그렇기에 역사는 무관심하고 시대와  상소를 초월하는 것을 추구했지만 헤겔은 변증법을 피었다. 예시로 나는 대학교에서는 학생이지만 고등학교에서는 선생이다처럼 모순과 대립이 현실에 잘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물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 

그렇기에 시대정신을 중요시 했는데 시대정신이란 인간의 정신은 개별적인 것이 아닌 집단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집단적 시대정신이 시간을 통해 변증법으로 발전해 옴으로써 역사가 발전해 나간다는 점이다. 이러한 발전속 개인은 과정에 부분적으로 참여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신은 쭉 발달해나가는데 유아기에 주관적 정신으로 아주 초보적이다 객관적 정신으로 청년기가 되면 성장한다. 그렇게 되면서 법체계, 정의, 도덕, 규범들을 인지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말고 절대정신인 완숙기에 접어들어야 한다. 법 그자체, 인류 그자체, 건물 그 자체, 즉 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란 절대정신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최고의 단계는 예술> 종교> 철학 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부분들이 나치로 발현될수도 있다는 비판또한 있었다. 

 

이날 수업시간에는 발표를 하였고 발표했던 나의 파트의 대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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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앞서 설명한 헤겔이 주장한 관념론까지의 발달과정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겠습니다.

 

본격적으로 헤겔이 주장한 관념론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관념론과 이에 대응하는 실재론에 대해서 다시금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우선, 실재론은 인식되는 외부 세계가 이를 인식하는 주

체와 무관하게 독립해서 존재한다는 견해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눈앞의 물질세계가 허상이나 가상이 아니라 진짜 세계이고, 나라는 존재의 탄생이나 소멸과는 무관하게 그대로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반면 관념론은 실재론과는 반대로 인식되는 외부 세계가 이를 인식하는 주체와 무관하게 독립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눈앞의 물질세계가 사실은 나의 내면세계라고 이해하는 관점입니다.

 

사람은 대부분 실재론자로 태어나서 살아가다가 죽지만, 삶을 실용과 안락한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진실과 깊은 이해의 측면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결국 실제 세계의 모습을 더 정확하게 반영하는 관념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엄밀하게 생각해보면 내 눈 앞에 펼쳐진 세계는 사실 모두 감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감각이라는 것이 나의 감각기관을 통해 발생한 주관일 뿐, 진짜 세계의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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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눈앞에 사과를 본다면 광원에서 입자이자 파동인 광자가 쏟아져, 사과의 표면과 만나서 일부는 흡수되고 튕겨 나간 광자 일부가 눈으로 들어오고 망막의 시각 세포를 자극합니다. 시각 세포는 빛 에너지를 흡수한 뒤에 이를 전기적 신호로 바꾸고 이 전기적 신호가 시신경을 따라 뇌까지 전달됩니다. 이렇듯 뇌는 신체의 각 부분에 연결된 시신경을 통해 전기적 신호를 받아들이고 종합과 해석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고 뇌가 해석한 이미지가 나의 내면에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눈에서 시작되어 시신경을 따라 뇌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빨간색'과 관련된 것은 전혀 없고, 이 사이에는 그저 전기적 신호만이 존재합니다. 빨간색이라는 것은 뇌가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빨간색은 내 신체 밖에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내 안에 있는 것일까요?

만약 빨간색이 밖에 있는 것이라면, 나의 눈앞에 다채로운 색깔들로 드러나는 외부 세계는 사실 나의 내면세계가 아닐까요? 우리는 외부 세계의 실체가 도대체 어떤 모습인지, 혹은 모습이라는 게 있기나 한 건지 도저히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란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가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후로 이원론적 세계관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고, 이것은 자아와 세계를 분리된 존재로 파악하게 했으며, 이로 인해 외부 세계를 실재하는 세계로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외부 세계를 내면세계의 반영으로 생각하는 견해는 17세기의 예비 단계를 거쳐 18세기 칸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지하고 심도 있게 탐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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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렇게 발달하게 된 관념론을 순서대로 짚어드리겠습니다. 처음은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새로운 인식론을 제시한 독일 출신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인데요, 칸트는 경험으로부터 획득한 관념만으로는 보편타당한 학문적 인식을 얻어낼 수 없다는 것과 이성의 필연적인 추론으로부터 획득한 합리주의 인식만으로는 현실적인 내용이 공허하여 학문적 인식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개별적인 감각적 직관으로부터 들어오는 다양한 표상들과 보편적인 타당성을 제공하는 합리적 사유의 선천적인 형식을 종합하여 새로운 인식론을 수립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산에 올라갔다가 토끼를 쫓아가는 여우를 보았을 때, 토끼와 여우도 우리처럼 그렇게 알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토끼라는 개념, 여우라는 개념, 쫓고 있는 개념 등을 선험적으로 파악하고, 그 상황에 적용하여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험적 주관의 작용에 의해서만 대상의 인식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칸트의 인식론은 선험적 관념론이라고 말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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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은 칸트의 철학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주관적 관념론을 전개한 주관적 관념론자 피히테입니다. 비판의 요지는 칸트가 주체적 자아를 외계에 종속하는 논리적인 자아와 외계의 주인이 되는 실천적 자아로 분열시켰기 때문에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의 통일적인 연관성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히테는 순수자아로부터 나오는 지식학의 세 원리를 확립합니다. 그 내용은 절대적인 순수자아는 스스로를 비아에 대해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아와 비아의 자아는 능동적으로 행하는 실천적 자아이다. 실천적 자아는 정립, 반정립, 종합의 변증법적 발전으로부터 부단히 활동하여 절대적 자아로 발전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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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피히테의 철학은 셸링에게 큰 영향을 줬는데요,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자연은 그저 기계적인 원자들이 집합인 것이 아니라, 어떤 생명의 힘을 지닌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이나 공기와 같은 무기질도 살아있으며 이러한 물질로부터 동식물과 인간 그리고 인간의 정서가 나타났다고 주장했습니다. 한마디로 세계 자체를 스스로 성장하고 진화하는 하나의 유기체로 본 겁니다. 다른 말로 자연 전체에 있는 정신은 물질과 같고 주체는 대상과 주관은 객관하고 이미 같은 거라고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세계를 절대적이고 신적인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쉽게 설명해서 칸트는 세계를 자아와 자연 둘로 나누어 정신,주체,주관과 대응하는 물질,대상,객관으로 구분했고 피히테는 이 모든 것을 자아로 묶고 자연 전체를 자아의 산물이라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셰링은 반대로 자연으로 이 모든 것을 묶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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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마지막으로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우선 헤겔의 관점은 마치 자신이 세계를 창조한 신이 된 것처럼 세계전체를 하나의 대상으로 놓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피히테의 변증법과 셸링의 절대자를 받아들여 절대적 관념론을 완성하였다. 그렇기에 자연이나 역사에 있어서 절대자가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전개해 가는 과정은 당연히 정신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헤겔은 주장합니다. 그래서 헤겔은 “현실적인 것은 이념적인 것이요 이념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를 주장함으로써 사물의 유한성과 변화의 논리를 심화시켰지만 다른 한편 신비적인 관념론의 입장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헤겔과 같은 사고방식을 흔히 목적론적 사고라고 하는데요, 도토리를 심으면 떡갈나무가 되듯이 도토리를 떡갈나무라는 목적을 가진 대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 세계는 어떠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현재는 단지 그 과정의 일부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사람 대부분은 이성이 완전하게 발달하고 자유가 최대로 발현된 상태가 목적지라고 암묵적으로 동의를 합니다. 헤겔은 이를 명확하게 표현하였습니다. 헤겔은 우리 세계와 인류가 나아가는 목적을 보고 그 목적 안에서 현재를 봅니다. 이러한 내용이 설득력이 있는 건 자기의식이라는 측면 때문인데 우리의 정신은 들여다볼수록 신비롭습니다. 세계와 정신이 이어져 있는 절대정신은 사람이 죽으면 없어진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공동체 속에서 이어지면서 변화를 겪고 발전해 나아갑니다. 이러한 인류의 메인 스트림인 정신을 자기 특유의 목적론적 사고방식으로 역사나 예술에 적용해 왔습니다.

 

그렇기에 토론주제로 저는 다음과 같이 설정하였고, 잠시 후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는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자기전개 방식에 대해 다음 발표자 김용완 학우분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채사장의 <지적인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중에

ⓒ 월간개벽.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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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주차 공자

드디어 동양철학인 공자에 관해서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과거 이성, 정신이 중요시 되었던 서양철학과 달리 동양에서는 ‘리’ 를 중요시했다. 그렇기에 동양의 처음은 공자로 시작하였다. 동양은 성질을 중요시하고 서양은 모양을 중요시한다. 서양은 자기중심적이지만 동양에서는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그렇기에 서양인들은 100%를 추구하고 동양인은 대부분이 속하게 되는걸 추구한다. 서양은 시각중심이고 동양은 청각 중심이다. 즉 개인적인것과 공동체에 관한 차이점이 있다. 

 

이런 차이는 공자때도 있었는데 공자는 뛰어난 경지로 즐길줄 아는 가난뱅이, 예를 좋아하는 부자,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을 들었다. 부자는 예를 갖추고 가난하면 즐거움을 갖춰야 한다. 즐거움은 조화를 돈독하게 하고 같아짐을 위하며 서로 친해지도록 한다. 예는 마땅히 구별되어야 하는것이고 달라짐을 위하며 공경하도록 하는것이다.

절차탁마란 말이 있는데 뼈를 깍는 노력을 통해 성장한 것인데 이러한 미적 각성을 중요시하며 공자는 너와 시를 같이 말할수 있게되었다는 말이 가장 큰 칭찬이다. 즉 공자는 음악을 통한 문답을 즐겨왔다. 또한 무조건 부모를 따르는것을 중요시 하였다는 관계중심, 부모중심의 사고는 비판할 여지가 남아있다. 

 

정리하면 플라톤은 이대아를 축구하였고 공자는 관계적 접근을 하였다. 플라톤은 죽음은 천국으로 가는 수단이었고, 공자는 자손을 통해 의지와 삶이 남아있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플라톤은 웃음을 배척하였고 욕망을 이야기 하는걸 자제하였지만 공자는 시를 최고의 예술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은 젊은이는 절제를 중요시했지만 공자는 법도에 맞는것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다보니 플라톤은 통치자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신들을 믿었지만 공자는 배운게 있으면 실천해야한다고 하고 배운게 있더라도 윗사람에게 물어가면서 실천해야 한다고 같은질문에도 사람에게 다른 답을 제시하듯 관계적인 것을 중요시 해왔다. 

공자는 효를 바탕으로 순종주의, 비판의 봉쇄, 암송과 추종을 강요하였고, 근대화 과정에서 획일화된 인간의 도구화와, 계약관계, 이익추구를 하다보니 획일화된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러한 배움자체에 관해서도 생각이 동양과 서양이 다른데 서양은 지식이자 과학을 추구했고 서양은 배움과 지혜를 추구했다. 지식은 이성이자 개념이었지만 지혜는 개념이 아닌 실천이라고 하였다. 

그렇기에 인을 중요시했는데 맹자의 인은 나의 도를 나스스로 온전히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감성적 미적 동화를 중요시 여겼다. 공자는 미래지향의 낙관주의자 였고 비판과 부정보다는 미래에 데힌 긍정을 중요시했고 예술사화적으로 사회를 발전해 나가길 바랬고 이러한 세상에서 인이 없으면 사회적 감수성은 공허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기득권을 옹호하는 옹호하는 보수주의이면서 현실에 대한 긍정보다는 비판과 부정이 필요한 현대라고 생각했다는 한계가 있다. 

 

발표는 공자의 인에 관해서로 시작하였다. 유교에서는 도의 도덕적 측면을 불교는 진리를 도라고 보았다. 공자의 덕은 일반적으로 삶에 나타난 모든 바람직한 인격과 그 인격의 발현결과라고 알려저 있다. 토론의 첫번째 주재는 부모가 죄를 짓거나 잘못된 길을 걷더라도 감싸 주어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부분 부모가 잘못된 길을 가지 못하도록 말해야 한다는 의견이 앞도적이었다. 대부분 이와 같이 생각하였지만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였다. 이미 토론 주제가 죄를 지었다는 시점이 그 당시에는 알 수 없기때문에 부모가 잘못된것을 전재로 하고있다. 하지만 그당시에는 모르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한다. 잘못된것인지 알수 없는 시점에서는 삶을 더 살았고, 자식을 위한다는 부모라는 전제하에 잘못되 보여도 결과론적으로 그게 옳게될수도 있기 때문에 어느정도는 감싸줄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번째 토론 주재로는 상대평가와 절대평가중 어느 것이 맞을것인가에 대해서였다. 절대평가가 맞다고 한 학생은 1점차이로 갈리는 성적으로 서로 견재를 하게되기에 결과가 안나온다고 하였고, 학업은 자신이 배우는 것이기에 상대적으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상대평가가 맞다고 생각한다. 자신만의 공부를 할것이라면 집에서 혼자 철학자가 되는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학생이 공부를 하게 되는이유는 더 나은 직업, 더 나은 환경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선 상대평가로 순위를 가릴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생깁니다. 또한 상대평가로 인원을 구분할수 있어야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토론주제는 공자가 대통령으로 나온다면 뽑을것인가 관한 토론이었다. 공자의 사상에는 민주주의의 관한 사상이 없어서라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덕을 최우선으로 하는 공자를 뽑을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었다. 나는 뽑을 생각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선 공자는 옛날사람이기에 지금의 사상과는 거리가 있다. 또한 과학분야와 사업분야에 큰 재재가 있을거 같기 때문에 뽑고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공자가 사람마다 다른 조언을 해주는 조언가라면 대통령은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마무리는 공자의 명언인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를 말하면서 토론을 마쳤다. 이번 토론은 너무 짧게 끝난거 같아서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7주차

7주차 수업은 주희에 관해서 였다. 주제는 우주가 정해준 선한 마음이다. 주희는 칸트와 반대되는 인물로 리를 탄생시킨 사람이다. 인간또한 동물과 같지만 선한것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말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선함을 하늘에서 가져왔는데, 인간의 본성이 곧 하늘의 이치와 같다고 해서 성리학이라고 하였다. 또한 자연을 도덕과 같은 자연스런 이치라고 생각하였다. 

주희는 악을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 것을 뜨거울때 시원한걸 먹는것과 같이 당연하다고 말을 하였다. 배는 물위에 떠야만 하듯이 도덕적 사실과 객관적 사실은 같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약의 본성은 몸의 온도를 유지하듯,본성이 곧 이치라고 하였다.

데카르트는 내가 생각하기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여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였지만  주희는 내안에 선한 본성이 내재되어있다고 생각하여 신이 나한테 선한 행동을 명령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에 인간과 자연을 동일시 하였고, 인간의 선한 본성은 자연의 법칙이라고 생각하였다. 데카르트의 신이 나를 일일이 존재케 하는것이 아니다라는 점과는 비슷했지만 리라는 것을 과학적 법칙과 도덕적 법칙의 합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악한게 존재하기에 이를 기를 통해서 설명했다. 기는 물질으로써 악해질 가능성이 있는것이다. 그래서 만물은 음과 양으로 이루어져있듯 인간은 선하지만 선악이 섞여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사덕을 인의예지로 인은 측은지심, 의는 수오지심, 예는 사양지심, 지는 시비지심을 의미한다. 하지만 악한 것을 느낄수도 있는것이 있는데 이는 칠정으로 희로애구애오욕을 의미한다. 

마지막 강의에서는 자연을 야생이라고 생각하는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는 하나의 일부분으로 어우러짐을 강조했다. 이러한 동양에서도 성즉이오 ㅏ무위자연이 나뉘었는데 유가는 우주는 착하고 순진한 학생의 이념을 따르며 만물의 위계질서를 인정하고 문명을 인정하였지만 도가는 우주는 착한것도 나쁜것도 아니고 흐르는 대로 두도록 하였다. 만물은 평등하다고 주장하였으며 반문명 주의를 강조하였다. 

 

수업시간에 발표내용은 주희가 누구인지로부터 시작되었다. 주희는 인간의 마음을 성과 기로 나누었다는 인강의 내용을 시작으로 조금더 자세하게 조사해온 내용들을 설명하였다. 그이후는 사단 사덕에 관해서 철명해 주었는데 이를 위해 끌어들인 칠정에 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이어서는 심성론에 관해서 설명해 주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질을 갈고닦기위해 수행이 필요하다는 말과함께 다음으로는 모더니즘에 관해서 설명해 주었다. 모더니즘은 환경파괴와 획일화 그리고 전쟁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어서 이러한 문제를 베트남전을 예시로들어서 리를 통해서 이를 해결할수 있다고 말을 하였다. 

 

첫번째 토론으로 동물실험은 금지해야 하는가에 관해서였다. 나는 동물실험은 해도 된다는 입장이다. 동물실험을 금지하자고 하는것은 지극히 인간의 윤리적 이기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동물실험을 금지해야한다면 동물을 먹는것은 괸찮은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문론 쾌락을 위한 자기만족의 실험은 자제해야할 필요가 있지만 동물실험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돼지의 심장을 유전자 변형을 통해 사람에게 맞게 키우고 이를 이식 해서 수명이 더 늘어났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처럼 의료 기술이 발달하면 더 많은 동물과 사람을 살릴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물실험을 금지한다면 사람으로 실험을 해야하는데 이것이 더 비윤리적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최근 코로나 백신만 보더라도 동물실험을 통해 개발한 백신으로 많은 생명을 살릴수 있었습니다. 또한 에초에 동물은 양육강식의 세계인데 우리가 육식 동물이 초식동물을 먹는것을 막을수 없듯이 사람이 동물실험을 하는것조차도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대되는 입장으로는 사람도 결국 동물이기에 이러한 동물권이 보장되야 한다는 입장이 있었다. 인간의 목적을 위해 인간의 동물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과학의 발달로 동물실험이 다른 대체수단이 많이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또한 우리 입장을 동물과 바꿔서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한 학생은 동물실험을 최소한으로 실행해야 한다고 말한 의견도 있었다. 코로나와 같은 특이한 경우에만 한정적으로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두번째 토론은 보상금을 목적으로 물에 빠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것은 정의로운가? 에관한 문제였다. 나는 정의롭다고 생각된다. 목적성이 어찌되었든 간에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것은 사회를 조금더 이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끔 하는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정의롭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주된 내용으로는 목적성보다는 결과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하였다. 하지만 반대로 의를 행하는데 목적성을 두면 그게 과연 의를 행한것인지 하는 의문을 재기할수 있습니다. 정의로움은 자신이 정하는 것인데 이미 자신이 목적성이 다른것이란것을 알고있다면 그것이 과연 자신의 정의가 될수 있을까에 관한것입니다. 다른사람은 모를지라도 내 자신이 알고있기에 진정한 의미에 정의가 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예시로는 봉사활동이 있는데 봉사신간만을 목적으로 봉사를 하면 봉사가 재대로 될수 없기에 있는맛 못하다는 예시가 있습니다. 

 

세번째 토론은 성선설과 성악설 무엇이 옳은가에 관해서 였다. 처음은 성악설 이 압도적으로 비중이 높았다. 어린아이가 울고 떼쓰고 하지만 교육으로 이러한 부분을 교화한다고 한다는 의견이었다. 예시로는 어린아이들이 왕따를 시키는 것에 관해서 였습니다. 저는 둘다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태어날때에는 백지상태입니다. 애초에 선악이라는 개념도 주관적이기 때문에, 백지상태의 사람의 살아가면서 보고 들은 주변 환경에 의해 누군가에겐 악인이되고, 누군가에겐 선인이 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하다는 입장으로는 누구에게나 양심이나 측은지심등의 공감능력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원래는 선하지만 목적성이 생기게 되는순간 욕망이 선을 이기게 된다는 입장이었다. 또한 교육만으로 사회질를 유지할수 있다는 점이 인간은 선하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의를 보고 나서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보고 사람은 원래 악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또한 선을 행하는 것이 힘들기에 선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그만큼 힘들다는 것은 아무나 할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유치원과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본 결과 아이들이 더 잔인하고 나쁘다는것을 알았지에 주관적으로는 선악설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공익을 위해 개인의 사생활은 공개될수 있는가에 관해서 였다. 나는 그 무엇에도 대답을 할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공개되는 사생활의 범위가 어디까지냐에 따라서 대답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사이버 감옥이 될수도 있습니다. 공개되지 않은 성범죄자를 사이트에 올렸던 사례만 보더라도 누구는 그것이 합당하다고, 누구는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생각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은 개인의 선택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개될수 없다는 입장으로는 개인의 사생활이 존재하기 떄문이 가장 큰 이유로 들수 있는데, 예시로는 코로나 동선 공개로 인해 2차피해가 발생했었다는 점이 있습니다. 그의 취향이나 이동 동선이 공개되면서 여러가지 삶의 어려움을 겪었던 점을 들수 있습니다. 또한, 인류적 스탠스로 보면 사생활이 더 중요시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인데, 대부분의 사람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며는 블라인드나 에브리타임같은 앱이 나온이유가 사를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 더 많기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것을 공개하고 통제하에 살아간다면 그게 과연 진정한 의미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너무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이라고 생각합니다. 




9주차 수업은 이황과 이이에 관한 수업이었다. 

저번 인간은 착한가?에 이어서 인간의 감정의 근원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두분모두 지폐에 나와 있으신데 두분 모두 조선 초기의 새로운 왕조가 세워지는 변혁기 였습니다. 그시대에 한참 토론주제로는 인의예지가 이었습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으로 이의 근거로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있고 이것 이외에 7가지 감정을 칠정이라 칭하였습니다. 물리법칙은 완벽하지만 선 그자체로 움직이지 않는 무형무취라고 하지만 기 는 자연적 도덕적 현실로 선악이 혼재하여 움직이고 변하는 유형유치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두가지 이 와 기 사이의 관계였는데 이황의 주장은 사단은 이로인해서 칠정은 기로 인해서 발생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단은 선하고 칠정에는 선악에 뒤섞여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는 그렇다면 이와 기는 따로 있는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따라옵니다.  이러한 의문을 기대승이 물어봤고 꾸준한 편지로 서로 사상이 풍부해져 갔습니다.

 

이러한 의문으로 이황은 기가 리를거쳐 사단에 이르고 리가 기를 거쳐 칠정을 이룬다고 하였으나 이이는 리가 기를 거쳐 칠정이 발생하고 그안에 사단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황의 의견은 리는 명령을 내릴수 없다는 모순이 있다. 원리는 움직이거나 작동할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형인이 있다는 모순이 생긴다고 이이는 주장하였다. 그렇기에 기가 먼저 작동할수는 없다고 이이는 말을한 것이다. 

이러한 이황의 입장을 주리론이라 하여 강한실천역을 바탕으로 영남지방에서 유행하였고 남인들이 주로 주장하였고 이이의 입장을 주기론으로 이론정합적인 내용으로 악은 지나치거나 모자란것으로 칭하며 기호지방에서 유행하였고 서인들이 주로 주장하였다. 

 

이어서 이어진 강의는 부패한 조정에 개혁을 외친 조광조로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개혁가들을 사림이라고 하였고 훈구파들이 이들을 4번에 거쳐 해를 입혔지만 사림이 결국 이겨냈습니다. 이처럼 이황과 이이는 예전부터 이렇게 토론을 해왔습니다. 이는 민주주의의 시초라고도 볼수있는데 조선은 올바르다는 것은 무엇인지 예전부터 고민해왔고 근대의 한계와 윤리를 말해왔으며 과학과 윤리를 통일시 하였고 신권중심의 토론을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내면의 수양을통해 종합의 부재를 강조하였지만 반대로 유럽은 안다는 것은 무엇인지 과학과 근대세계에 관해 관학을 윤리와 구분하고 왕권위주와 시민혁명을통해 칸트의 종합적 의견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어진 수업시간에는  처음은 인간의 본성과 현실사이의 괴리에 관해서 설명했는데, 사덕 인의예지와 칠정을 다시금 짚고 넘어갔다. 칠정은 희노애구애오욕으로 격정적이고 현실적인 감정을 나타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리와 기로 넘어갔는데 리는 원리,법칙을 기는 현실을 나타냈다. 

그래서 이러한 리에대해 이황의 의견을 조사하였는데 기대승이 리와 기가 따로 있다는 것을 시작으로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이고 수정하여 사단을 순선무악 할수있다고 하였다. 기대승의 2번째 비판인 사단이 선일뿐만아니러 칠정또한 선이라는 점을 칠정이 볼래 선하나 악으로 흐르기 쉬운것으로 수정하였습니다. 사단은 리가 발달하여 기가 그것을 따르는것이라고 정정하였습니다. 

다음은 동서양의 감정에 대해서 발표를 하였는데 몸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감정이라고 하였습니다. 동양은 사덕으로 감성을 다스리지만 서양은 이성을 통해서 이러한 감정을 다스릴것을 중요시 하였다. 마지막은 동서양의 의의에 관해서 인대 이황vs 기대승의 사단칠정논변은 성혼과 이이의 사단칠정논변으로 발달하였다. 

이어서 이어진 토론으로는 리없이 기만 존재하는게 가능한지와 기없이 리만 존재하는게 가능한지에 관해서였다. 둘다 불가능하다는 의견도 있었고 수학과 과학처럼 이론만 존재하고 현상은 모르는 것이 있기에 기없이 리만 존재하는게 가능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기만 존재할수도 있다는 의견에는 닭은 매일아침마다 밥을 먹지만 어느날 밥이 될수도 있다는 예시가 있다. 

두번째는 현실과 도덕적 원리중 어느것이 우선시 되는가에 관해서였습니다. 대부분 현실이 중요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도덕적 원리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이 우선시 되는가 였다면 현실이라 답할것이지만 우선시되어야  하는게 질문이기에 도덕적 원리를 택했다. 그게 더 어렵기 때문인데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도덕적 원리를 지키는 사람을 존경하게 되는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나 부처가 있습니다. 

또다른 의견으로는 현실은 도덕적원리를 바탕으로 형성된다는 의견이 있었다. 

다음주제는 감정을 제어하는게 맞는걸까? 에 대해서였습니다. 감정은 표현의 한 종류로 표현하는 자유가 있다는 의견과 큰 목적의식을 위해서 감정을 제어하는게 맞다는 의견이 있었다. 또한 사회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감정을 제어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토론 주제는 내가 속한 조직에서 최고 권위일때, 팽생을 정론이라고 믿어온 지식, 또는 조직의 법규와 원칙을 연배, 경력 모두 한참 아래인 인물이 정면으로 반박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것인지 냐가 틀렸다면 현재의 지위를 미현없이 버릴 수 있는지에 관해서였다. 보통 이야기를 듣고 물러나지만 미련이 생길거 같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내가 나를 믿기 때문에 자신의 신념대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을한 학생도 있습니다. 만약 제가 회사의 ceo이라면 저는 퇴사룰 선물해 줄것 같습니다  제가 원해서 하는 사업이기에, 만약 내가 잘못된 것이면 그친구가 나가서 회사세우고 성공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10주차

10주차는 정약용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정약용은 처음으로 성리학을 벗어난 사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실학의 대표자는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강진으로 유배를 가서 거기서 살면서 많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는데 가족에도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유교를 가게된 이유는 천주교를 믿었기 때문이다. 천주교를 믿는 이유로 일가가 몰살 당했지만 정약용은 살아남아서 크게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렇게 성리학이 불교와 다름없다고 여겨서 수사학을 하였고, 공자로 되돌아가자를 모토로 성리학을 전면 부정하며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을 상제라 칭하였다. 리를 격하시키고 단지 원리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을 기호라고 하여 취향차이라고 하였는데 인간은 착한 행위를 즐기고 좋아하는 존재로 성기호설을 주장하였다. 욕망을 선과 악의 근원이라고 보았지만 욕망을 무언가의 원동력이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정약용은 인성론으로 인의예지라는 명칭은 일을 행한 뒤에 얻어진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정약용의 사상은 주희와 다소 차이점이 있었는데 사덕을통해 사단을 발현된다는 주희와는 다르게 정약용은 사단에서 사덕이 나온다고 주장하였다. 즉 주희는 인간과 사물은 본질적으로 동등 하지만 현실적으로 차이가 하였지만 정약용은 인간(도의와 기질)과 사물(기질뿐)은 기질적인 면에서는 유사하나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 근대 유럽의 휴머니즘을 상조하였고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결합체라고 보았다. 그러다보니 음양오행설을 부정하였다. 그러다보니 유전학적으로는 주희가 맞다는 한계가 있다. 

 

즉 주희는 초월적인 신을 부정하였고 무신론적 도덕론을 강조하였으며 인간을 긍정적인 존재라고 보았고 인간과 자연은 하나라고 보았다. 그러다보니 신권을 중시하였고 대면적 덕성을 중요시하였으며 욕망을 제어하려 들었고 원리적으로 주기론을 들었다. 이에반해 정약용은 하나님을 긍정하였으며 신에 의한 강력한 윤리를 주장하였고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였다. 그러다보니 인간과 자연의 이원론을 중요시하여 강력한 왕권을 중시하였고 외형적 제도를 중시하였다. 욕망을 긍정하였으며 주리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수업시간에는 정약용이 누구인가로 시작하였다. 그는 학문을 세상을 다스리는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신유박해의 생존자 이기도 하였다. 이로인해 강진유배생활을 사의제라는 곳에서 하게 되었다. 사의제는 네가지응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의 주요 업적으로는 실학을 집대성 하였고, 토지제도를 개혁안(여전제, 정전제)을 마련했고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정약용은 천주교와 큰 연관이 있었는데 이로인해 신유박해의 피해자 이기도 하였다. 살아나가 위하여 배교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다보니 정약용은 성기호설을 중요시 하였는데 영지의 기호는 선을 즐거워하고 악을 미워하는것이라 하였구 형구의 기호는 인간의 눈이 좋은 빛깔을 좋아하고 따듯하게 입고 배부르게 먹는것을 좋아하는것으로 전자는 동물은 모르지만 후자는 동물또한 알고있는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정약용은 하늘은 하나님으로 보았는데 기존 성리학에서의 표준은 잘못되었고 인격신을 중요시하였다. 그렇다 보니 사단을 통해 사덕을 이룬다고 하였다. 

 

토론주제로 첫번째는 교통약자석에 앉으면 벌금을 무는것을 법으로 강제해야 할까에 관한 이야기였다. 시작은 벌금을 강제하면 안된다로 시작되었는데 앉는것만으로 벌금을 내기에는 효율적이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자유롭게 앉지만 양보를 통해서 눈에 보이면 양보하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눈 만으로는 판단하기에는 어렵기에 벌금을 물어야 한다는 입장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노약자의 기준이 애매하다고 볼수있다는 의견이 나왔는데 이러한 부분을 최근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들고다니기에 이를 활용하여 패스를 사용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2번째 토론주제는 사회적 혼란으로 규범이 사라지고 가치관이 붕괴되면서 나타나는 사회적 개인적 불안정 상태에 자신이 놓여 있다고 가정하고 그 상태에서 자신과 가족 또는 지인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 놓여졌을 경우 자신이 살기위해 다른 누군가를 포기할 것인가에 관한 질문이었다. 나는 나의 사람에 관해서는 끝까지 같이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서는 혼자서 살아남아도 의미가 없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나자신만의 최소한의 그룹은 필요하다. 로빈슨크루소에서 프라이데이가 괸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넷플릭스 지옥에서 교주는 모든 사람이 살기위해서 잘못된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저는 이러한 시스템은 올다고 보지 않기에 문제는 같이 해결해 나아가야 하는것이지 누군가에 의해 해결된것처럼 살아가는것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그러니 이러한 상황에서는 내가 누군가를 버리고 선택하기보다는 우리가 같이 살아가는것을 택하고 싶습니다. 

 

다음 주제는 자신의 시력이 0.3 이고 자신의 앞에 환자는 눈을 보지 못한다면 하나뿐인 시력이 2.0이 되는 약을 환자에게 양보할지, 환자몰래 자신이 먹을것인지에 관한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투자가치가 높은 앞에사람에게 준다는 의견이 많이있었다. 이와 반대 의견으로는 앞의 환자가 지인이나 가족이 아니라면 구지 나의 불편함을 감소하고 다른사람을 돕고 싶지 않다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환자에게 양보하지도 않고 내가 먹지도 않을것이다. 내가 의사라는 가정은 다양한 의학지식이 있다는 것이고 이약을 분석하기위해 다양한 노력을 할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눈이 안보이는 엄청난 부자에게 약을 팔고 그 돈으로 더 많은 환자들을 위해 재단을 설립할 것이다.

 

마지막 토론주제는 인의예지는 인간의 본성일지 행동의 결과일지에 관한 것이었다. 주희는 인간의 본성이고 정약용은 행동의 결과라고 하였다. 나는 후자쪽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인의예지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기보다는 학습에의한 결과라고 생각하기에 그렇다. 또한 인의예지를 뜯어보면 인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돕는것도 의리를 지키는것도 예를 표하는것도, 학습을 하는것도 행동을 통해서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11주차

 

강의는 막스 베버에 관한 내용이었다. 부제는 전국을 향해, 자본주의를 향해서 이고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관한 내용이었다. s 헌팅은 말했는데 개발도상국에서 민주주의는 사치품이고 민주주의적 정치체제로 이행하려면 우선 경제발전이 이뤄줘야 한다고 말이다. 

 

가치합리성과 목적합리성이 있는데 가치합리성은 순전히 가치합리적으로 행위한다는 것으로 예견할 수 있는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의무나 품위 아름다움 종교적 지시 또는 어떤것이 되었든 과제의 중요성이 그에게 명하고 요청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무언가에 대해 자기의 확신에 이바지하며 행위하는 사람의 경우를 일컫는다

목적합리성은 자신의 행위를 목적 수단 그리고 부차적인 결과에 지향하며 이때 목적에 대한 부차적인 결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가지의 가능한 목적을 서로 합리적으로 저울질하는 사람의 경우를 일컫는다. 

그렇기에 목적합리성의 입장에서는 가치합리성은 언제나 비합리적이라고 느껴진다. 

 

그러다보니 탈주술을 주장하였는데 볼테르는 신과 내세를 믿지 않는 계몽된 중국의 발전을 보라 목적합리성을 주장하였고 탈주술은 구원 수단으로서 주술을 배제하고 아무런 동기도 없는 거친 초자연적인 힘이 이 세계를 소란스럽게 휩쓸면서 온갖 짓을 다 한다는 믿음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였다. 베버는 개신교를 제외한 세계종교의 공통특징은 탈주술의 결여를 주장하였고 황홀한 동거라고 하였다. 

 

예정조화설은 신의 결정은 번복될 수 없으므로 신의 은총은 그 은총을 받은 자가 잃을 수도 없고, 그 은총을 거부당한 자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미 절대적인 자유로 개개인의 구원 여부를 결정지어 놓고 있어서 전대미문의 개개인의 내적 고립감을 형성하였다. 독실한 청교도는 매장을 할 떄에도 모든 종교적 예식의 흔적마저 거부했고 이웃을 노래나 음악도 없이 매장할 정도로 탈주술 실현을 하였다. 

 

직업을 예정조화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하였고 자신을 선택된 자로 여기고 모든 의심을 악마의 유혹으로서 거절하는 것을 단적으로 의무화 혹은 자기 확신에 도달키 위한 가장 탁월한 수단으로 부단한 직업노동을 임명하였다. 

 

유교는 주술성이 있어서 모든 불긴한 사건들은 신의 명령에 따른 천지간의 조화가 주술적인 힘에 의해 교란되는 징조였다. 

 

맹자가 주장한 자본주의는 경제적으로 생활이 안정되지 않아도 바른마음을 가질수 있는것은 선비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렇듯 유교에서의 자본주의는 훌륭한 임금이 백성의 생업을 설정하고 부모를 섬기게하고 하는것을 목표로 하였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임금은 대단치 않다는 주장또한 있었다. 

 

수업간에는 자본주의를 향한 맥스 베버에 대해 다시금 발표하였는데, 독일의 철학자로 자본주의 사회의 등장으로 이점을 찾다보니 책을 쓰게 되었다. 여기에는 개신교의 등장이 큰 영향을 미쳤고, 여기에는 예정조화설이 주축을 이뤘다. 네직업에 충실하면 구원에 가까워지기에 노동을 하게끔하여 발전하였다. 그렇기에 막스베버는 가치합리성과 목적합리성을 강조했는데 가치합리성은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확신에 이바지하며 행위하는 것이고, 목적합리성은 자신의 행위를 수단 목적 그리고 부차적인 결과를 지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탈주술화를 주장하였는데 미신을 믿지 않고 노력을 통해 구원을 얻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기에 교리는 모든 지업은 신성하다고 하였고 이타적 에너지를 공동체 전체로 향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렇기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문화에 집중해야 하고 문화는 국가의 태도, 희망, 인생의 목표에 대한 감각이라고 하였다. 자본주의를 주장한 막스베버의 반대로는 칼 마르크스가 있고 그는 공산주의를 주장하였다. 

 

이는 동양과 서양에서도 차이점이 보이는데 맞스베거가 말했듯 서양에서의 성공은 돈을 벌어서 자본주의적으로 성공을 하는것이고 동양에서는 정치적으로 성공하는 것이다. 

 

이에이어서 한 토론은 금욕적인 삶이 자본주의를 만들었고 옳은 사상이라고 생각한다면 마약을 금지하지 않는것은 옳은가? 에 관한것이었다. 처음은 너무 중독성이 강해  사용하면 안된다는 주장이 있고, 그에반해 담배보다 중독성이 약하기 때문에 어느정도의 마약은 허용해 주어도 된다는 내용도 있었다. 나는 마약을 허용해 주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어느 티벳의 고원의 스님들은 명상을 할때 의도적으로 마약성분을 섭취하고 명상을한다. 그로인해 뇌파를 더 활성화하여 자기수행을하고 스스로를 통재하고 다스리는건데 이처럼 현대의 사람도 하고말고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정할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중독성이 강하다면 자본주의논리대로 세금을 엄청 크게 측정하여 자본과 담배와 같이 마약을 선택하게끔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다음 토론주제로는 예정설은 인간의 구원은 개개인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미리 정해저 있다라고 하는것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노력을 하는것은 무의미한것인가?에 관한것이었다. 나는 노력하는것에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적으로 자기만족이 될수있다. 나의 경험상으로는 실패를 하더라도 최선을 다했으면 후회가 없었지만 노력하지 않았으면 그때 노력할 걸 이라는 후회를 했던것 같습니다.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냥 문장만 놓고 봤을 때는 노력은 무의미 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원과 상반되는 지옥은 성격에서 말하길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지옥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노력여하에 따라서 무언가 정해지는것이 아닌 예정설대로 구원이 정해진 것이라면 노력은 개개인의 선택 이라고 생각됩니다. 

 

세번째 토론 주제는 개신교 윤리가 가져온 부의 풍용허 시간이라는 구속이 생긴 삶과 물질적으로 부족하나 시작적으로 여유로운 삶중에서 무엇이 좋은가 인데 저는 시간이라는 구속이 있는 삶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mbti가 j이기때문에 시간이라는 것은 구속이 아닌 사용할수 있는 좌표인 셈입니다. 그 렇기에 시간을 쪼개면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또한 만약 시간을 초월한 신이나 어떠한 영생의 존재가 된다며는 삶이 너무 재미가 없을것 같습니다. 내일하면 되지, 나중에 하면되지, 하면서 미루게 될거같고 무언가를 이뤄낸다는 성취감또한 얕아질것 같습니다. 

마지막 토론 주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중 무엇이 더 올은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사상적으로 옳은것은 공산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재미를 자본주의에서만 느낄수 있다고 대부분 말을 하였지만 모든 사람들이 생존에 요구가되는 사항이 적어지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창작활동에 할애할 시간이 많아진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로인해 문화가 발달하고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공산주의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라고 하면 북한이나 중국을 떠올리지만 저는 북한이나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를 표방할뿐 이라고 생각합니다. 

 

12주차

12주차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관해서 였다. 부제는 신화가 되어버린 계몽, 미신이 되어버린 과학 이었는데 계몽의 변증법에 관해서 였다.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인 상황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새로운 종류의 야만적인 상황으로 빠져들고 말았는가 하는 의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계몽이란 목적은 자연의 지배를 위해서 인간또한 내적 자연으로 자연의 일부로 보는것이다. 고로 계몽은 인간의 인간을 지배하는 과정으로 보았고 계몽은 계몽의 정반대의 것과 같아졌다. 계몽이란 지배의역사, 몰락의 역사라고 할수있고 수학적, 개념적 지식을 추구한다. 신화적 세계로부터의 탈피 탈마법을 주장하였다. 

 

이런 계몽의 문화산업으로는 계몽은 마치 독재가자 인민을 다루듯 사물을 다루는데 독재자는 인민을 조종할 수 있는 만큼만 인민을 이해한다. 과학적 인간 역시 사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만큼만 사물을 이해한다. 계몽 이전에는 자연이 인간을 지배하고 계몽 이후에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한다 보고 애니미즘이 사물을 영혼화했다면, 산업주의는 영혼을 사물화한다. 도구적 이성을 비판하고 퇴행을 중요시 여겼다. 

 

마지막 강의에서는 오웰은 책을 금지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와 반해 헉슬리는 아무도 책을 읽으려 하지않아 책을 금지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오웰은 우리에게서 정보를 차단하려는 자들을 두려워 했지만 헉슬러는 우리에게 너무 많은 정보가 주어져 소극적이고 자기중심적이 될 것을 두려워했다. 이를 통한 결론은 절망하고 철저하게 절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절망을 할때 이는 성장으로 이루어진다. 

 

수업시간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어떤 사람인지를 시작으로 발표를 시작하였다. 각 인물들이 언제살았는지와 어떠한 직업들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였고 계몽의 변증법에서 계몽을 철학적 의미인 봉건적 구습, 종교적 전통의 의한 무지, 미신, 도그마에 지배당했던 민중의 몽매를 자연의 빛, 즉 이성에 비추어 밝히고 자유사상, 과학적 지식, 비판적 정신을 보급하고, 인간의 존엄을 자각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계몽주의의 장점으로는 민주주의 산업혁명 과학혁명이 있고, 단점으로는 제국주의 노동착취 세계대전이 있습니다. 변증법이란 시대 라는 한계를 극복하는 방식으로 이성적 주장을 통해 진리를 확립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두명 이상의 사람들 사이의 담론이라고 합니다. 

 

계몽변증법은 인류는 왜 이토록 참혹한 전쟁을 일으키고 자기 자시을 파괴시키기 직전에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그렇기에 이성체계가 정해주는 모적 효율성 달성에 이용된다고 보았다. 그러다보니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인류의 역사에서 되풀이 되었던 수많은 계몽의 과정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도구적 이성이란 자연을 어떻게 지배하느냐에서 발전된 계산적 이성으로 보았고 이성이 비판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면서 조구적 이성으로 전략한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오디세우스 신화에 관해서 설명해 주었는데 이를보고 모든 인간의 희생행위는 계획적으로 이루어질 경우에 대상이 되는 신을 속이게 된다고 하였다. 헉슬리는 우리가 좋아하는것들이 우리가 망하게 될것을 두려워하고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들이 우리를 망하게 할것을 두려워한다. 

 

첫번째 토론 주제는 과거에 비해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는 현대에서도 계몽의 시대가 필요한가? 에 관해서였다. 경제성장이 빠르게 되고있고 이미 사람들이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계몽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있는반면 지금의 체제보다 더 나은 체제가 있을수도 있으니 계몽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한다는 입장도 있었고, 경제발전 이외에 환경문제에 대해서 계몽을 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었다.  

 

두번째 토론 주제는 산업혁명으로 발전된 현대문명이 인간에게는 진보인가 퇴행인가에 관해서였다. 발표자는 자연이 파괴되는 여러가지 새로운 부작용이 생겼기에 퇴행이라고 하였지만 그런 꺠달음을 얻어가기에 진보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에반해 전자기기에 의존하게 되어 문명의 발전은 퇴행이라고 하는 의견도 있었다. 나는 진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불을 발명한 순간 이후 끊임없이 발전해 왔습니다. 인간이 멸망해서 없어지지 않는한 변화하며 나아가는 인간은 끊임없는 진보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퇴행하는 순간은 마지막 사람이 죽는 그 한순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번째 토론 주제는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들이 우리를 망하게 할것을 두려워 했지만 헉슬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우리를 망하게 할것을 두려워했다. 현대사회를 보았을때 누구의 주장이 더 옳은지에 관해서 였는데 양쪽 의견이 다 비슷하게 존재하였지만 나는 둘다 아니다. 우선적으로 우리가 망할것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발전해 나갈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멸망한다면 좋아하는것에 멸망하는게 조금더 비극적이라고 생각합니다. 



13주차

수업은 김구의 백범일지에 관해서였다. 이를 자세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조선반도 사상의 전통에 대해서 알아야하는데 원효는 동일 신라의 정치적, 현실적 지도자라고 하였고 최재우는 서학과 유교를 포섭하는 천도교였으며 김구는 유교>동학>불교>기독교를 거쳐 보편적인 민족주의를 주장하여 사상보다 민족을 우선시하여 제국주의와 공산주의를 단호히 배격하였다. 

 

그러다보니 보편적 님족주의를 중요시 하였는데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사상의 배경으로 그는 어린시절 부모에게 저항하였고 과거시험에서는 부정행위를 하였으며 중국인인척 계약 동거를 하기도 하였고 수감 생활 중  자살 기도를 하였다. 승려시절 무위도식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이영훈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였는데 기분은 나뿌지만 일본으로 인해 서구문명을 수용하며 우리가 발전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민족주의 없는 근대화는 불가능한 것일까?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하며 근대화의 전제는 민족주의로 일제의 식민지화는 조선의 민족주의가 전제되지 않은 근대화라고 할수 있다. 민족주의 없는 근대화는 어렵다고 보는데 결론적으로 보편은 민족을 떠나서는 무의미라고 민족은 보편을 저항할때 정당할수 있다고 본다고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공산주의는 지나친 보편을 추구하고 민족의 현실을 외면하지만 제국주의는 보편된 외면이고 편한한 민족주의라고 할수 있다. 

 

수업시간에는 근대화를 온몸으로 체험한 김구의 이야기를 풀었다. 그렇게 처음은 백범일지를 토대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는데 거기에 나와있는 김구의 일대기를 한번더 설명해 주었다. 그 다음에는 그의 사상인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에 관해서 말해주었고, 조선반도의 사상전통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4장으로 김구와 빌라덴에 대해서 비교해 주었는데 공통점으로 둘은 개인, 경제적 이득이 아닌 가치를 추구하였고 테러를 이르키고 요인 암살을 지시하였지만 차이점은 둘이 의도가 김구는 일제강점기 특정 대상을 목표로했다면 빌라덴은 자신의 사상맘대로 민간인까지 죽였다는 점이다. 

 

이어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찬성하는 입장과 반론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반론에서는 식민지때가 아닌 독립을 한 이후에 발전을 했다는 것을 근거로 하였다. 

 

첫번째 토론으로 김구와 빈라덴은 같은 테러리스인가? 에 관해서였다. 대부분 다르다고 하였는데 김구는 특정 목적이 있었고 최후의 수단으로 테러를 선택한 것이지만 빈라덴은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서 테러를 하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세상에 이름없는 무덤은 없다고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김구가 필요했던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하지만 테러리스트란 사실에는 편함이 없기에 인류의 입장에서 봤을때는 불편하지만 같은 테러리스트라는 입장도 있었다. 

 

두번째 토론 주제는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근대화가 가능했을까? 에관한 입장이었는데 저 주장은 일본이 자신의 입장을 합당하게 하기위해 만든 핑계뿐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문화가아닌 우리들만의 힘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한국은 근대화 이후에 혼자힘으로 빠르게 성장하였습니다. 이것만 봐도 한국은 혼자서 성장할수 있는 힘이 있지만 단지 타이밍이 저시기였기에 일본은 저렇게 주장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주제를 위해 공공의 이익을 위해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였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경찰과 마찬가지로 필요하다는 입장과 어찌되었든 폭력은 어느상황에서는 정당화될수 없다고 피해를 유발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나는 폭력은 개인이 공공의 이익을 주장하며 외치면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다면 일정부분 정당화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주제로는 편법을 사용해서 재벌이 된다면 편법을 사용할 것인가?에 관해서였다. 나는 편법또한 하나의 방법이고, 이러한 편법들이 모여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와서 세상을 발전시킨다고 생각한다. 

 

14주차

 

어느덧 마지막 수업 인 14주차가 되었다. 마지막은 김용옥의 동양학 어떻게 할것인가에 관한것이었다. 많은 예전 수학의 정석이라 할수있는 책들이 동양철학에도 있고 이를 번역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큰 숙제이다. 여기서 번역이라는 문제는 개간의 방법론이고 정초의 작업이며 이 사회의 만연된 고질을 뿌리뽑는 전환의 돌파구이다.

이러한 번역에는 많은사례들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으로 치즈가 있다. 이러한 번역만을 하고 있는 현대에는 과연 과거와 같던 지성인들이 있을까? 20세기는 지적 황무지라고 할수도 있다. 자생적 축적이 없는 텅 빈 시간의 창고이기에 우린 이러한 공백의 기점으로 되돌아가 차곡차곡 매꿔나가야 한다. 

그예시로 기학이 있는데 몸을 기의 집합이라보고 심신이원론과는 무관하다 본 학문이었다. 이는 순수침술비판의 실폐 사럐로 볼수 있다. 

 

수업시간에는 마지막 수업은 없고 교수님이 준비해오신 내용으로 이야기를 하였다. 철학은 말되게 삐딱하게 생각하기란 말과 함께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우리가 당연하게 느끼는것을 의심하기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셨다. 과연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은 사실일까? 미래에는 죽지 않을수도 있고, 우리는 윤회할수도 있고 컴퓨터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수도 있다. 

시간은 과연 멈추지 않을까? 과연 다른 행성에 가도 시간이 똑같이 흐를까? 시간은 생대적 이기에 극한으로 간다면 정지한것에 수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엔트로피는 증가하기만 할까? 우리의 과학이 이게 한계인것이 아닐까? 사실 모든 철학은 거짓말이 아닐까? 이것을 주장한 철학자는 노자이다. 도가도 비상도이다. 진리라고 말을하면 진리가 될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흔하게 부르는 물건들조차 고유명사가 따로 있을수 있다. 이에 따라오는 질문은 김치는 우리나라 음식일까?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음식들을 김치라고 부르지 않고 그나라 음식의 명사가 있지 않을까? 그나라의 음식들을 임정하고 고유명사를 불러줘야 할까? 그렇다면 그 음식이 다른나라로 들어가서 그나라에 맞게 바뀌면 또 다르게 불러야 할까? 

이렇듯 언어가 다르니 학문은 올바른 번역을 통해 이루어져야한다. 고유명사들은 고유명사라고 인정해 주더라도, 철학을 대하는 언어, 의미를 깊게 갖는 언어는 우리가 깊게 살펴보고 번역을 올바르게 해야 그 뜻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자는 우리에게 있어서 필수인 것일까? 우리가 영어를 배울때 라틴어를 배우지 않듯이 한자를 몰라도 한글로만 그 의미가 이해할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교수님이 말씀해 주셨다. 나는 IT시대로 넘어가면서 한자같이 너무 많은 글자를 가지고 있는 언어는 발전을 지체시킨다고 생각하기에 한자보다는 한글 위주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나라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어느적 사회적 통념이된 단어들은 이념이 아니고 지칭명사이기에 이런것을 번역하는것이 아닌 학문의 언어들만 조심스럽게 번역해야 한다는것이 김영옥의 주장이다. 그래야만 한국철학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비교철학 수업이 마무리되었고, 철학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깨닫게된 매우 만족스러운 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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