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 16:09ㆍ공부/교양
트롤리 딜레마_반대(모두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효율성과 융통성
개개인마다 느끼는게 다른데 한명을 죽이는걸 납득 못하는 사람딜이 많을수도 있다.
입론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만약 이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면 세상 모든 악이 다수의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인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는, 인간이 이성과 지성을 갖추지 않은 짐승과 다른 점은 본능이나 이익만을 쫓아서 행동하지 않고 약자에 대한 도덕과 윤리, 소수를 위한 사회적 배려를 합의를 통해 얼마든지 고고하고 지켜야만 하는 감정으로 도출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합리화될 수 있다면 약육강식, 강자 지배와 같은 우생학적 의지 역시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을 여지가 다분하다. 반대하는 소수의 목소리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혹은 약자의 위치에 있는 소수의 목소리는 강자인 다수의 목소리에 비해 가치가 없고 당연히 무시해도 되며 그들의 인권이나 권리마저도 상황에 따라서 침범할 수 있는 것으로도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저는 다수의 생존을 위해서 소수의 목숨을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견입니다. 우선 가장 큰 이유는 소수를 희생해서 다수를 구하기 시작하면 결국에는 남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이들을 살리는 쪽이 옳다는 논리는 포장은 훌륭하나 결국에는 희생시키지 않아도 되는 이들을 희생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희생을 달가워하는 이는 없고 이상론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더 많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 더 적은 이를 희생시킨다는 건, 결국 사람 목숨을 저울질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울질하여 더 가치 없는 것을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이 세상 모든 것을 내버릴 수 있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지 전 모르겠습니다. 버리고 버리고 버려서는 안될 것마저 모두 버리게 된다면 이 세상에는 무엇이 남아있을까요. 생명을 소중하기에 다수를 살리자는 의견은 이렇게나 모순된 것입니다. 자신을 현명하다 여기면 모든 것에 잣대를 가져다 댑니다. 하지만 정말로 현명한 이는 평가를 하지 않는 법입니다. 머리로만 생각하지 않는 것, 이와 리를 따지지 않고 제 마음이 가는 길을 따르는 것을 협의라고 부릅니다. 명석함만을 믿고 가치를 판단하는 순간 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 사람 목숨에는 위아래가 없기에 한명 한명이 모두 소중하다면 한 명의 죽음과 천명의 죽음을 비교하게 되지만 이는 틀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목숨과 1000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곡식 중에 선택할 수 있습니까? 만약 1000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곡식을 선택했다면 목숨이 곡식보다 못하게 됩니다. 애초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비교하고,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하게 되면, 결국 세상은 모든 것의 가치를 나누게 됩니다. 그럼 평가하지 말아야 할 것을 평가하게 되고, 깎아내리지 말아야 할 것을 깍아내리게 됩니다. 처음에는 한 명의 목숨이 될지도 모르지만, 전쟁으로 예시를 들면 그다음에는 적진에 포위된 아군의 목숨, 그다음엔 전방에서 싸우다 쓰러진 부상자의 목숨! 그다음엔 동맹의 목숨! 그다음엔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 어린이와 노약자, 그다음은 민간인까지!
장기 이식 사례 건강한 신체를 가진 한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다. 그런데 그 병원에는 지구상에서 전쟁을 없앨 수 있는 위대한 정치가, 대부분의 질병을 없앨 수 있는 의학자, 우주의 비밀을 밝혀낼 과학자, 인류의 기술 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킬 수 있는 공학자가 각각 시한부 질병으로 입원해 있다. 이들 4명의 위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의 장기를 떼어 이식하는 것이다. 이때 장기를 뗀 건강한 사람은 죽는다. 당신은 이들 환자를 담당하는 의사다. 병원의 보안이 워낙 잘되어 있어서 건강한 입원 환자의 장기를 모두 떼어내서 죽인다고 하더라도 이는 외부에 절대 알려지지 않고, 곧 사회에 불안을 절대 초래하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단순한 형태의 행위 공리주의에 따르면 이때 당신은 그 건강한 환자를 죽여서 장기를 네 명의 위대한 사람에게 이식하는 것이야말로 도덕적이다.
"한 사람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야기하는 것'은 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결과적으로 '방치하는 것'보다 비도덕적이다"
길 가던 사람의 지갑을 빼앗아서 자선 단체에 기부하는 것
이러한 방향성을 추구해야 한다
사실 선로 전환기를 수동 조작할 것이라면 이물질 등을 이용해서 탈선시키는 것도 방법이다. 트롤리는 부서질지언정 사람은 다치지 않을 수 있으니까.
혹은 모두의 부담을 나눠가져 사이좋게 팔 한쪽씩 >> 인권을 존중
진정한 민주주의는 소수의 의견도 존중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도구일뿐
히틀러도 다수결로 정권을 잡고 소수 유태인을 학살함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한가? 라는 주제를 처음 들었을 때 전 영화 ‘메이즈 러너’가 떠올랐습니다. 세균에 감염된 지구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백신을 몸 안에 가지고 있는 소수의 아이들을 희생시킨다는 내용입니다. 그들의 인권은 보장 되지 않으며, 단지 소수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의견은 묵살되고 동의 없이 실험을 진행합니다. 이러한 상황들은 우리 사회에서도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의 희생이 다수를 위한 정당한 행동이라면, 그들의 희생은 당연한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적은 수이지만 그들도 엄연한 인권을 가지고 있는 주체입니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다수가 만들어낸 편견과 정당성으로 인해 소수가 피해를 입는다는 것은 소수의 자유권을 억압하는 것과 같습니다. 꼭 희생이 있어야만 할까요? 소수가 다수를 위해 떠안아야할 부담을 다수가 조금씩 나누어서 가지면 되지 않을까요? 우리는 우리가 정당성의 근거라 믿고 있는 ‘다수의 이익’을 한번쯤 의심 해봐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는 피라미드 구조, 보통의 경우 한명이 편하기 위해서는 여러명이 희생을한다. 하지만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하다보면 언젠가 체계가 무너질수 밖에 없다?
입론
본 문제는 소수와 다수간의 선택 이전에 다른 사람의 죽음에 내가 직접적으로 개입을 하냐 안하냐의 문제입니다. 더군다나 그 개입의 이유가 보다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라면 그저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 할 핑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자살을 하려는 사람을 말리지 않는 것과 환자의 생명유지장치를 직접 떼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희생하는 사람의 자발적인 선택에 기인해야 하는 것이지 희생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그 순간 이기심만이 남은 집단 린치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트롤리 딜레마의 맹점은 소수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빼앗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가이다. 여기서 트롤리 딜레마의 문제가 발생합니다.미국 철학자 주디스 자비스 톰슨이 공리주의적 사고의 상투성을 뒤집었다. “당신은 폭주하는 전차를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철로에는 5명의 인부가 있다. 그런데 당신 옆에 엄청나게 뚱뚱한 사람이 있다. 당신이 그를 밀어 철로 위로 떨어뜨린다면 인부들을 구할 수 있다. 어떻게 하겠는가?” 1명을 희생시키는 행위가 ‘레버’가 아닌 ‘손’으로 바뀌자 응답자들은 “내가 살인할 수는 없다”며 다수를 포기했다.
가 허술한 것은
사람의 목숨은 다수나 한 명이나 그 중요도가 같다.
반론:
이순신. 가덕도전.
초동 1명 사망, 병사 5명 납치.
조선 수군은 이순신 장군의 명령 하에 모든 계산적 손익을 포기하고 가지고 있는 탄환을 일본군 진영에 퍼부었다.
왜군 측에서 끝까지 버티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상륙하였고 결국 왜군 측에서 포로 5명을 송환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조선 수군의 위력이 아님. 쏟아부은 포탄의 개수와 명분 없는 상륙작전은 큰 위험성 대동. 그러나 이순신 함대의 진정한 힘은 생명중시 방침. 이로 인해 병사들은 이순신을 신뢰할 수밖에 없었고 결속과 충성심으로 승리까지 이어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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