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12. 01:04ㆍ공부/교양
저와 친구의 대화 내용을 써 내려가 볼까 합니다. 저에게는 교수님과 마찬가지로 항상 여러 가지로 토론하기를 즐기는 친구가 있습니다. 이 친구와는 주말 아르바이트를 같이하는데 매번 이동시간이 2시간 정도 겹치다 보니, 일하러 가는 시간은 저와 친구의 소중한 이야기의 장이 열리는 시간입니다. 친구에 대해서 조금 설명하면, 랩을 통해 세상에 자신만의 확고한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 꿈인 친구입니다. 그러다 보니 저의 친구는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관과 철학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토요일에 저희의 이야기는 친구의 고민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저의 친구는 최근 2대2 소개팅을 나갔었습니다. 그리고 소개팅에서 으레 그렇듯 아이스 브레이킹 토크부터 평범한 재테크, 하는 일등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외로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친구가 말하길, 이러한 일상적인 이야기들은 미래지향적이고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이야기인 것은 맞지만, 삶의 진리를 쫓아가며 자기만의 음악을 하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다른 거 같고 굉장히 멀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속마음과 생각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없어서 사람들 사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롭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동안 어울리지 못하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느끼는 고독감을 잘 알기에 친구와 기꺼이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친구는 이러한 외로움을 느낀 후 우울한 감정이 밀려왔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짜인 틀 같고,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세상 속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신 혹은 초월자라고 부르는 누군가가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동떨어진 느낌을 받게 되니 자연스럽게 세상이 연극과도 같게 느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틀을 조금 깨는 생각에 다다를 때는 마치 시스템 혹은 신의 존재 때문에 생각이 턱하고 막힌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는 게 상당 부분 우울했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감정을 느껴봤던 저는 최근 바뀌게 된 저의 생각을 말해주었습니다. 우리가 기존에 이야기를 해오면서 오랜 시간에 걸려서 내온 답들이 진짜 어이없게도 과거에 이미 많은 철학자가 해왔던 이야기였다는 것을 저는 이번 비교철학 수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자, 소름이 돋으면서 나와 친구의 대화가 과거부터 사람의 생각이 발달해온 과정을 그대로 밟아 갔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자연스럽게 저는 이러한 생각을 하나의 학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렇기에 다양한 관점에서의 생각들을 해보아도 무엇이 맞는 사상인지가 아닌, 각각의 관점에서 생각을 다르게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관점들을 철학이라는 학문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고 완벽한 진리를 쫓지 않게 되다 보니, 그런 진리를 쫓는 데서 오는 무력감이 사라졌다고 느낀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이 말을 통해 친구는 영감을 받아서, 우울감을 해결하였습니다. 하지만 저와는 조금 다르게 이러한 우울감도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해결하였는데, 달리 말해 관점을 바꿔서 우울감이 없다면 행복감도 느낄 수 없기에 이러한 우울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감사한다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진 친구의 질문은 나는 왜 사는가였습니다. 불행이 행복의 거울이라면 행복이 불행의 거울이 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살아가는 이유가 없기에 두렵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나의 답은 최선을 다하기 위해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게 멋지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저는 더 큰 목표를 위해 살아갔었습니다. IT를 비롯한 극도의 기술 발전은 사람들을 하나로 이어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왔고,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VR 세상 속에서 하나로 이어진 채 하나의 집단지성으로 살아갈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도 이러한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현재의 저는 현실에 더 충실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아까 이야기한 친구의 무력감, 이 세상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시스템이라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으로 이어지는데, 만약 이 세상이 영화라면 저는 B급 영화가 아닌 멋진 저만의 영화를 살아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세상이 영화 속이라고 가정하면 주인공인 저는 세 가지 행동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현실이 영화인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영화인 것을 알았기에 이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인데, 이 경우에는 명상을 통해 혹은 과학의 발전을 야기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현실을 벗어나 열반의 경지에 오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나가게 된 세상 또한 현실이 아닌 영화 속 영화라면? 이라는 의문이 따라옵니다. 이러한 무한한 반복이 계속되는 패러독스에 갇혀서 끊임없이 현실을 쫓아가는 것을 저는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마지막의 세 번째 행동은, 현재에 최선을 다하면서 동시에 멋지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빌런으로, 누군가는 주인공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제가 주인공인 저의 영화에서 저만큼은 남들과는 조금 색다르고 온갖 경험을 해볼 수 있는 재미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일론 머스크가 말했던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의 논문 <당신은 컴퓨터 시뮬레이션 속에 살고 있는가?>와 결이 비슷합니다. 40년 전 2D 게임에서 20년 만에 스타크래프트가 나오고 현재는 다른 세상에 온 듯한 VR 게임마저 나왔는데 수천 년이 지난 후에 시뮬레이션은 과연 어떻겠습니까? 그럼 현실과 똑같은 세상 속에서 사람은 어떻게 느낄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아마도 시뮬레이션이 발전하기 전 인류가 멸망하거나, 시뮬레이션을 만들고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의 경우는 이미 시뮬레이션을 현재에서는 돌리지만, 미래에는 의도적으로 기술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경우로는 우리는 이미 시뮬레이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차라리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길 바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전제였던 고민, ‘세상을 살아가는 게 시스템에 짜여서 누군가의 의도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 저는 이러한 문장을 학문적으로 받아들이고 나는 의도가 어찌 되었든 나는 나로서 멋지게 살아갈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반면에 친구는 이러한 고민을 통해 느껴지는 고통 또한 즐거움의 일부인 것이고 만약 이러한 시스템을 구축한 ‘신’이 있다면 자신도 붓다와 같이 모든 자본주의의 제약에서 벗어나 그러한 ‘존재’가 돼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를 통해 이미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지만, 자신의 음악을 세상에 알리고 하고 싶은 창작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다는 결론을 끌어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의 좌우명이 처음 생겨난 것 같습니다. ‘인생을 영화같이.’ 어떻게 보면 단지 멋지게 살자 하는 의미인 문장 같지만, 좌우명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무슨 영화가 될지는 오롯이 저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는 말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하다가 생각하는 자신을 의심하는 순간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모순이 발생하므로 생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입증했던 데카르트와 비슷하게 우리는 처음 이러한 시스템을 의심하다가 각자의 목표를 다지고 꿈을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마지막으로 저도 한 문장 남겨봅니다. “우리는 생각한다, 고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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